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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 운동의 상해 ③

 동경사건이 전해지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 전쟁에 우리도 한몫 끼어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는 일을 하라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전쟁에 한몫 끼이기는 목마르니 우물파는 식으로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 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연소탄을 장치하여 이것을 태워 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정전협정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전쟁이 막을 내리,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 정전협정의 중국  측 전권은 곽태기였다. 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척식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할 수 없었다.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 최흥식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시장에서 채소 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때에 한 번 큰 목적을 달래 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더니 윤 군은,
 "할랍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 김홍일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와 교섭하여 한 명이 메는 물통과 도시락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다. 김홍일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직접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보니 기사 왕백수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서 그 속의 사면을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에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왕 기사가 말해주었다. 그래서 20여 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김홍일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은 우리가 운반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가마귀 떡 감추듯 이집 저집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사건 이후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선생님, 아이 좀 보아 주세요."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4월 29일이 점점 임박해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대장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하루는 윤군이 홍구에 갔다가 와서, "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와 선단 말야요. 내게 폭탄만 있었더면 그때에 해 버리는 겐데." 하고 아까워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윤군을 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윤 군은 내 말에 무료한 듯이,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하고 변명하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하고 내가 치하포에서 쓰치다 조스케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렸던 것과 고능선 선생에게 들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건 기특할 게 못되니, 깎아지른 절벽에서 손을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네.'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윤 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 군의 집으로 가서 김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만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요?"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일을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쯤 해서야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구 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서 일본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술렁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중국인이 던진 것이라 하고, 혹은 고려인의 소위라고 하였다. 우리 동포 중에도 어제까지 채소 바구니를 지고 다니던 윤봉길이 오늘에 경천위지 할 이 일을 했으리라고 아는 사람은 김구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였을 것이다.
 이 날 일은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 선생에게도 이 날은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본인의 천장절 경축 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 야촌 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 날 일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것은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상해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나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비밀히 불러 이로부터 나를 따라 일을 같이할 것을 명하고 미국인 피취(George Ashmore Fitch)씨에게 잠시 숨겨 주기를 교섭하였더니 피취 씨는 흔쾌히 승락하고, 그 집 2층을 전부 내게 제공하므로 나와 김철, 안공근, 엄항섭 넷이 그 집에 있게 되었다. 피취 씨는 고인이 된 피취 목사의 아들이요, 피취 목사는 우리 상해 독립운동의 숨은 은인이었다. 피취 부인은 손수 우리를 보살폈다.
 우리는 피취 댁 전화를 이용하여 누가 잡힌 것 등을 알고 또 잡혀간 동지외 가족의 구제며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보내 편지까지 하였건마는 불행히 안창호 선생이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잡히고, 그 밖에 장헌근, 김덕근과 몇몇 젊은 학생들이 잡혔을 뿐이요, 독립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동포가 편안히 지낼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 주경란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 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하였다.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게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일본은 제 1차로 내 몸에 20만원 현상금을 붙이더니 제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부 합작으로 60만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상해 법조계에서 한 발자국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를 타고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 대장 집에 혼인 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이 10여 명의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 대장 집 아궁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 먹고 벌써 나온 뒤여서 아슬아슬하게 면하였다.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주겠다고 말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법조계를 지나 중국 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흥 수륜사창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가 은주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 놓은 곳으로, 이동녕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 전에 벌써 옮겨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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